책/신앙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 정성욱 / 홍성사

dobbby 2024. 1. 1. 13:19
반응형

 

 

1.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1) 백 퍼센트 하나님 책, 백 퍼센트 사람의 책?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사람을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성경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당신의 말씀이 되게 하시기 위해 성경에 오류가 없게 하셨지.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책이기 때문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네.

성경의 매력은 그것이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인 동시에 참으로 인간적인 책이라는 사실에 있다네.

2) 성경과 다른 종교의 경전은 어떻게 다른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역사 현장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어야 할 뿐 아니라 그렇다고 믿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는 관계적 종교이기 때문일세

기독교의 본질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살아 숨쉬는 사람 사이의 관계성일세.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신앙의 근본으로 이해하지.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자신을 열어보이신 계시의 기록이자

그 계시의 내용이 모순되지 않고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성령님을 통하여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책이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 그대로 담겨 있는 하나님의 책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겠습니다.

성경 66권을 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인 것 같네

창세기 1장 28절,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문화를 개발할 것을 명령하는 문화명령으로 해석하고 있다네.

하지만 나는 그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네.

나는 이 구절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고 복 주신 것으로 해석하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국민이 많아지는 것을 뜻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국토를 잘 관리하라는 뜻이고,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라는 것은 국권을 행사하라는 뜻이지.

창세기 2장 16-17절

아담과 하와를 통해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내용과 질서를 규정하는 헌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네.

하나는 '임의로 먹으로' 라는 명령에 기초한 자유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먹지 말라' 는 금명에 토대를 둔 권위에 대한 순종의 원리이지.

자유 안에서의 순종, 순종 안에서의 자유.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지.

이 원형적 하나님의 나라가 사탄의 유혹과 사람의 범죄로 상실되는 것 같았지만,

둘째 아담이자 마지막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확장하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것이

바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라는 걸세.

3)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죠?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바로 성경의 어떤 구절이든지 그 구절 속에 있는 본문 전체의 문맥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네.

4)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 어떻게 봐야 하나요?

역사비평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이성만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은 계몽주의자들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 이성이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꾸며 낸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 성경 해석의 네단계

첫째, 문법적 해석의 단계로서 문장의 장르를 구분하고 문맥을 파악하는 단계

둘째, 역사적 해석의 단계로서 본문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살피는 단계

셋째, 신학적 해석의 단계로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사역과 뜻과 계획에 대해 해석해내는 단계

넷째,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묻고,

그것을 통하여 얻은 영적 통찰을 현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묻는 단계

 

 

 

2. 구약과 신약은 서로 모순된다?

5) 사람을 죄에 빠뜨릴 선악과를 왜 만드셨나요?

사람에게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 이전에 에덴동산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 분은 엄연히 사람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할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일세.

말하자면 사람은 여전히 피조물이며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천명하셨지.

6) 아담의 죄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만큼 심각한 건가요?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아담과 하와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죄악,

하나님의 왕권과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죄를 범한 것을 의미한다네.

7)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분 같아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은혜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복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자유와 순종의 원리로 확립하셨죠.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원칙 없는 불장난 같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거룩하신 성품에 기초된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로봇이나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발적인 의지 결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격적 존재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한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의 마음과 순종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교훈인 것 같습니다.

 

 

3.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스럽다?

8)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나요?

존재론적 논증이란

중세 신학자 안셀름의 주장으로서하나님이란 개념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안셀름은 '하나님 그 분 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 이라고 정의 내리고,

이런 분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논증을 폈습니다.

목적론적 논증

토마스 아퀴나스와 영국의 종교철학자 윌리엄 팔리가 제창한 것으로서

모든 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움은 그 배후에 어떤 설계자가 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입니다.

우주론적 논증이란

이 세상의 만물은 다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주장이지.

우리가 전제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거야.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네.

불신자와의 접촉점

첫째, 우리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고,

그 갈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말해줘야겠지.

아울러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갈망을 채우실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어.

둘째,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내가 나의 인생이나 세계의 주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겠지

그 다음에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열망 자체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지.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하지. 그 말씀은 곧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회복 시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네.

셋째,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실 때 그 마음에 당신의 법을 심으시고 양심을 주셨네.

비록 죄로 인하여 그 양심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양심은 선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지.

사람은 자신의 죄와 불의로 이러한 양심의 소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사실을 입증해 주는 실례로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불의가 불의로서 정죄되고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내려질 때,

그리고 의가 의로서 인정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내려질 때 기뻐하는 마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거나 현재에 저지르고 있는 죄를 숨기려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은 가지고 있다네.

9)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죠?

어거스틴은 악의 기원을 피조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오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악을 혐오하면서도 제거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능하심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과정에서 오는 필요악으로서 당분간 허용하시겠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고요.

그렇게 허용하시겠다는 결정이 악한 것이 될 수 없음은

그 결정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여전히 선하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장차 악에 대해 영원한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분명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성령을 통해서 넉넉히 이 과정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게 돕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나 거룩하심은 전혀 손상될 수 없습니다.

10) 왜 나에게 고난이 오는 건가요?

고난과 고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올 때는 크게 두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크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오는 고난과 죄의 대가로 오는 고난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고난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선물로서 우리를 성숙하고 고결하고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교육 도구가 된다.

후자의 경우, 다윗이 밧세바와 통간을 한 뒤 찾아온 고난처럼 징계가 필요하다 싶을 때 내리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해 죄의 악성을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징계 방법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믿는 이들을 더욱 성숙케 한다.

 

 

4. 기독교는 우리 현실과 배치된다?

11) 성경과 과학,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데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네. 나는 궁극적으로 과학은 성경 또는 신앙과 모순될 수 없다고 믿네.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법칙과 원리들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따라서 희미하게나마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지시하는 면을 가진다면,

과학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신앙과 모순될 수 없다고 믿네.

문제는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성경의 신앙과 모순되는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체계를 가지고

성경의 신앙을 공격하고 정죄하려는 유사 과학자들의 잘못된 행태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적인 진리 주장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근본주의적인 태도일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라고 생각하네. 신앙인은 과학의 이야기를 열린 자세, 겸손한 자세로 들어야 하네.

이러한 요건을 갖추지 않고서 과학과 신앙을 손쉽게 통합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12) 기독교는 너무 가부장적인 것 아닌가요?

예수님이 여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마리아와 마르다 같은 여성 제자들, 창녀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등

불륜 때문이 아닌 이상 이혼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창조 원리와 질서를 회복하는 의미와 더불어

당시 만연되어 있던 여성 차별적인 이혼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

여성이 법정 증인으로도 채택될 수 없는 사회에서

기독교 진리의 핵심 중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첫 증인이 여성인 것

부활의 사실이 너무나도 확실하여 어떤 반대 의견으로도,

심지어 증인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으로도 폐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나타내는 의미

예수님이 남성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남녀 동등 원리를 지지하지만

남녀 관계에서의 대표성은 남자에게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의미가 있지.

사실 이 대목을 잘 이해해야 하네. 여기서 대표성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성은 섬기는 대표로서, 여성은 섬김을 받는 팔로워로서의 기능을 가지면서

여전히 동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또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표하는 창조원리와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

13) 교파는 왜 그리 많은가요?

다양성을 강조하시면서도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유지해야 그 다양성이 아름다움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고전 12장,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

즉, 한몸으로서의 통일성과 여러 지체와 은사의 다양성이 조화롭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말씀.

엡 4장, 믿음도 세례도 성령도 하나님도 하나, 사랑의 끈으로 하나됨을 잘 유지하라.

*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 공통점. 삼위일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채택

- 차이점. 가톨릭은 구약의 외경 7권을 받아들여 73권이 정경, 개신교는 66권만 정경

= 성찬식에 대한 이해. 가톨릭은 떡과 잔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화체설을 주장

개신교는 영적임재설, 기념설, 공재설을 주장

= 칭의교리에 대한 이해. 개신교는 이신득의, 이신칭의 주장, 가톨릭은 이신득의에 '행위'를 더 추가하는 면이 있음

* 장로교와 침례교의 차이

- 세례를 주는 양식 침수와 뿌림의 차이, 장로교만 유아세례 인정

- 교회 정치론의 차이. 장로교는 교인의 대표인 장로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대의 민주제를 지향

- 침례교는 장로 없이 모든 성도가 직접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제인 회중정치를 지향

어떤 사람들은 장로교의 칼빈과 감리교의 웨슬리의 신학이 많이 다른 것처럼 과장하는데, 공통점이 더 많고,

다만 정치에서 감리교는 감독제 지향, 장로교는 민주제 지향한다.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 자체가 부정적일 수 없다는 것, 그 다양성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려면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

 

 

 

 

5.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평등하다?

14) 모든 종교는 동등한 것 아닌가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구별점

첫째, 삼위일체적 신관,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단일신론적 신관과 뚜렷이 구별.

둘째, 인간관, 유대교도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보고, 이슬람교도 인간의 선행 가능성을 인정, 불교는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 불성을 실현함으로써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침.

기독교는 원죄론적인 인간관으로서, 자연적인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덕적인 선을 행할 수 없고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고 하네.

셋째, 구원관, 불교의 구원관은 철저히 자력 구원, 이슬람이나 힌두교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위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지.

구원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해야하는 유일한 길은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처음 구원이 주어진 후 그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성령하나님이 항상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관은 '오직 은혜'에 기초한 것이라네.

15)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구원되죠?

경건한 불가지주의 입장

성경이 어떤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이 죽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세가지 분명한 것이 있지.

첫째,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그들을 불의하게 다루지 않으시리라는 것.

둘째,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복음 전도와 선교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네.

16) 불교 신자에게 복음 전할 방법은 없나요?

불교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 불교에 대한 선지식, 그리고 접촉점의 활용

사랑과 존중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

대화에 들어가기 전 주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필요

불교 신자들은 고와 집을 멸하고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자신들의 자연적인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여러 수행 방식들이 개발되어 있습니다. 명상, 고행, 참선 등이 있죠.

하지만 불교 신자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이러한 수행에 정진하면 할수록,

그들은 개인적인 좌절과 갈등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 신자들이 이루려고 하는 그 이상적인 상태를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불교 신자들이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지는 않겠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열반을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구원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린 뒤 부활하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참 안식을 얻으라고 초청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 영혼을 거의 얻은 것이나 다름없죠.

불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공로로써 업보로부터 해방되려고 하죠.

특히 팔정도 라는 수행방법을 통해서 집착을 제거하고 선행을 행함으로 공덕을 쌓아 업보를 줄이고자 노력합니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모든 죄와 죄책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업보를 예수님이 대신 지셨다고 생각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