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심리학 / 김병수 / 인물과사상사
01. 돈으로 행복을 사다
돈으로 행복을 사는 일반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물건보다 경험을 사면 행복해진다. 몇백만 원으로 명품 가방을 사면 잠시 행복해지지만 두고두고 추억에 새겨질 여행을 하면 그 만족감은 훨씬 오래간다.
둘째, 남을 위해 돈을 써야 더 행복하다. 나를 위한 선물을 사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기부를 하면 같은 돈으로 더 큰 만족을 얻는다.
셋째, 같은 돈으로 작은 것을 여러 번 사는 것이 낫다. 목돈으로 명품 가방을 하나 사놓고 모셔두는 것보다, 소소한 것을 여러 번 쇼핑하면 ‘소확행’을 느낄 수 있다.
04.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다
외로움에 관한 연구 결과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가족과 함께 사느냐, 친구가 많으냐와 같은 물리적 연결보다 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외로움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구가 많고 약속이 꽉 차 있어도 ‘아, 나는 너무 외로워’라고 느끼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혼자 살면서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을 다녀도 ‘난 괜찮아’라고 자족하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고립되는 것보다 주관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조사한 연구 결과를 보면 결혼한 사람 중 62.5퍼센트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이 외롭다고 느끼는 비율은 26.7퍼센트에 불과했다.
배우자와 함께 산다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혼자 산다고 무조건 외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결혼하면 외로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같이 살고 있는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단절되면 외로움의 고통은 더 커진다.
소외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암 통증이나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
서로 모르는 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들이 그냥 같이 있을 때는 괜찮다.
하지만 한 명을 제외한 두 사람이 같이 캐치볼을 하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은 괴로워진다.
“캐치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마음 아플 것까지 있느냐?”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소외시킨 채 자기들끼리만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괴로워진다.
‘나만 혼자다’, ‘나만 소외된 것 같다’라는 느낌은 뇌의 배측전대상피질을 활성화시켜서 통증을 유발한다.
외로울 때 몸이 더 아픈 것도 이 때문이다. 관심을 끌려고 아픈 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뇌가 소외와 외로움에 민감하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이토록 고통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동력이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에 대한 민감도는 부분적(50퍼센트)으로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외로움·사회적 고립·우울증의 유전적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1994년부터 1995년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난 1,116쌍의 일란성 쌍생아를 대상으로 대규모 종단 연구를 시행했는데, 2016년에 그 결과가 발표되었다. 사회적 고립과 주관적으로 느끼는 외로움 사이에는 유전적 요인(상관계수 0.65)이 있고, 외로움과 우울증 사이에도 유의미한 유전적 상관성(상관계수 0.63)이 있다고 밝혀졌다. 사회적으로 고립된다고 모든 사람이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며, 외로움을 느끼는 데는 유전적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외로운 것은 어떻게 해도 떨쳐지지 않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감정이다.
사람은 모두 외롭다. 지금 외롭지 않다고 해도 언젠가는 외로워진다.
인생 주기에서 외로움의 강도는 U자 형태를 띤다.
청소년기에 외로움을 크게 느끼다가 청년기에 줄었다가 중년을 지나 노년에 들어가면 외로움이 급격히 상승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어도, 그들과 완벽하게 연결될 수 없다.
인간은 타인에게 영원한 이방인일 뿐, 어떤 인간관계도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 못한다.
외로움은 어떤 인간관계로도 해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05. 왜 나쁜 관계를 끝내지 못할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얻을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애당초부터 없거나 매우 낮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신은 타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거나, 학대받더라도 자기 탓이라고 믿는다.
맞고 살면서도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배우자에게 아주 적은 보상만 얻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라고 믿는다.
자존감이 타인에 대한 기대나 관계에서 얻게 될 보상 수준을 미리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니, 학대받아도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다.
관계란 으레 그런 것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관계 경험이 쌓일수록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자신은 관계를 끝낼 능력조차 없다고 인식한다.
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도 사라지고 만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은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도, 더 나아질 것 없다는 비관적 전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면, 관계의 질이 낮아도 안주해버린다.
양육자와의 애착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 대인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추억보다 학대받았던 기억이 많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관계를 맺어도 별다른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쯤 되면 현재의 나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고통받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려고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한다.
배우자와 공유하는 경제적 조건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관계가 끝나면 지금까지 쏟아온 노력과 과거의 시간은 사라진다.
시간과 많은 자원을 쏟아 넣은 인간관계는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쉽게 끝내지 못한다.
매몰 비용 오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부 관계나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긍정적 환상, 소위 말하는 ‘콩깍지’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관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배우자의 부정적 특성은 과소평가하고 긍정적 특성은 과대평가한다.
“술은 마시지만, 깨고 나면 착한 사람”이라거나 “폭력적이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인지를 왜곡한다.
이런 아내는 끝까지 ‘내 사랑으로 남편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06. 자괴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죄책감은 도덕 규범을 위반했을 때 따라붙는 감정이다.
죄책감을 느끼려면 자신이 규범을 어겼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는 잘못이 없더라도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죄책감이 유발된다.
‘잘못했다는 인식이 없으면’ 죄책감도 없다.
“나는 도덕적으로 결백하다”는 강한 믿음이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죄책감은 생기지 않는다.
죄책감은 자기 행동이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났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우울증 환자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어도 죄책감을 느낀다.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잘못했다는 믿음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생기면 죄책감이 따라오고, 죄책감이 우울증을 악화시킨다.
죄책감과 우울은 항상 짝을 이룬다.
수치심은 자신의 개인적 이상에 맞게 행동하지 못했을 때 따라오는 감정이다.
자기 내부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느끼게 된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능력과 상관있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어찌 되었건 스타일이 구겨져서 부끄러워 못 견디겠다”라고 할 때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이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나는 엘레강스하고, 차밍하고, 위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아 이상을 갖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화장이 잘 먹지 않은 얼굴에 헤어스타일까지 부스스한 채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있는데, 그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괴로움이다.